폴 세잔(Paul Cézanne)과 파리 전시회
폴 세잔(Paul Cézanne)과 파리 전시회
2011-10-13 16:34:00
여름을 만끽했던 인디안 썸머가 지나고, 스산하고 우울한 전형적인 파리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한국 같았으면 천고마비 계절의 푸르른 하늘이 청명하기만 한 가을일테지만, 유럽 특히 파리의 가을은 쓸쓸하기만 하다.
가을의 중심 10월, 파리 중심의 Musée du Luxembourg 에서는 2011년 10월 10일부터 2012년 2월 26일까지 'Cézann et Paris(세잔과 파리)'라는 제목의 멋진 전시회가 시작되어 흐린 파리의 가을을 위로한다.
• Cézanne et Paris
• 장소 : Musée du Luxembourg
19 rue de Vaugirard, 75006 Paris
• 기간 : 2011.10.10 ~ 2012.2.26. 화~목 10시~20시 & 금~월 09시~22시
휴관:2011.12.24/31일 2012.1.1
• 입장료 : 12 €/ 할인 7.5 €
20세기 근대 회화의 선구자, 폴 세잔
20세기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빈센트 반고흐, 폴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고흐와 고갱이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라면 세잔은 입체주의와 대상의 객관적 진실을 표현하려는 현대미학의 깊은 뿌리를 제시했고, 인상주의 이후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실험의 장을 마련해준 작가로 평가된다.
동시대 다른 화가들이 배를 꼻아가며 그림을 그렸던데 반해 세잔은 은행장의 아들로 태어나 경제적 어려움없이 지원을 받으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세잔이 남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의 콜레주 부르봉(중등과정)에 입학해 기숙 생활을 하던 당시 몸이 너무 약하고 지독한 근시의 동급생을 만나게 되는데 언제나 또래에게 놀림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던 이 약한 소년을 힘세고 덩치좋은 세잔이 도와주며 우정을 쌓게 되는데 바로 그가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졸라이다. 이들은 이렇게 우정을 다지며 30년간의 깊은 우정을 지속해간다. 총명했던 세잔은 우수한 성적으로 아버지 뜻에 따라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하며 법류과 미술학교 수업을 병행해 간다. 그러나 더 넓은 세상에서 미술을 접하고 싶었던 세잔은 당시 이미 파리로 상경한 대학에 낙방한 에밀졸라의 자취방에 거하면서 그는 자신의 첫번째 파리 생활을 시작한다.
세잔, 그리고 파리
세잔의 파리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의 독특한 화법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동료들의 놀림의 대상이 되었고 살롱에 출품하면 낙방하기 일쑤 였다. 특히 1863년의 살롱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는데, 심사위원들이 지나치게 까다롭게 심사를 하였다는 항의로 여론이 일어나자 결국 나폴레옹 3세가 낙선전을 열도록 해 주었다. 이 낙선전에서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라는 작품이 큰 파문을 일으킨다. 낙선전은 이후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고 결국 세잔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1874년 살롱전에서 외면받던 일군의 젊은 화가들은 사진가 나다르의 스튜디어에서 그룹전을 열었다.
모네, 드가, 피사로, 르느와르, 시슬리, 그리고 세잔 등의 무려 30여명의 화가들이 작품을 내놓았던 대규모 그룹전으로 바로 이 살롱전이 역사적인 제 1회 인상주의전이다. 당시 세잔는 동료화가들 조차 그림이 선정적이고 관객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에 전시회에서 소개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몇 몇 주요 화가들의 강력 추천으로 전시회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역시 전시회동안 많은 비평가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며 마네의 그림과 비교 당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전시회에서 같은 비평가들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엄청나게 혹평하며 조롱하기까지 했으니 아케데믹한 그림에만 익숙했던 이 비평가들의 편협한 예술 이론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에게 상처를 줬을지 상상 할 수 있다.
세잔 역시 비평가들의 혹평에 큰 실망을 안고 다시 고향 엑상 프로방스로 내려간다. 그리고 두번째 인상주의전에는 작품을 출품하지 않고, 1877년 세번째 전에 17점의 작품을 출품하지만 혹독한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되며, 결국 자신의 작품을 이론적으로 옹호할때까지는 다시는 전시회를 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파리에서의 아픈 기억들을 담고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이제 정물화를 그리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비평계를 피하려 하는 그는 역설적으로 엑상 프로방스에 파묻히면서 더욱 유명해진다. 그는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자신의 그림을 더 이상 전시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지만 입을 다문다. 에밀 졸라와 같은 극소수의 친구들만이 그의 속사정을 안다고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년간의 모색 끝에 세잔는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게 되며, 그 후 피카소나 브라크, 또는 칸딘스키나 클레의 세대가 이에 영감을 받고 그를 현대미술의 창시자로 인정하게 된다.
세잔이 선보이는 작품 세계
1860년 이후 파리와 고향에서 번갈아 생활하면서 그림을 계속하다 파리의 아카데미 주이스에서 피사로를 알고 초기 약 10년간은 어두운 바로크 풍의 주제를 힘찬 필치로 그렸다. 엑스의 학우 쇠라와 친교하고 그 미술평론의 지혜를 빌렸다.
1870년대 초에 피사로에게 인상주의를 배우고 객관적 묘사로 전향, 색채도 서서히 밝기를 더했다. 안정된 건축적인 구도, 견고한 형태(포름), 청과 등색을 기초로 하는 명쾌한 색채 감각등이 특징적이고 또 만년의 초상화에서는 깊은 인간통찰과 철학적인 명상성을 그렸다. 에밀 베르나르 및 젊은 화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회화론이 들어 있고 편지의 구절에 의해서나 작품 그 자체에 있어서나 큐비즘을 비롯한 현대의 모든 유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세잔은 후기 인상주의자들 가운데 형태와 구성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구축한 화가이다. 즉 인상주의의 회화를 이루고 있는 순간적 인상에 영원성을 지닌 견고함을 첨가시킴으로써 인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마네 피사로 르느와르 기요맹과 같은 인상주의의 거장들을 만났지만 세잔는 무엇보다도 먼저 고독한 인간이었다.
출처 : 한위클리 / 이소혜 http://www.francezone.com/bbs/view.php?id=017&no=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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